작은 병에 몽당색연필을 모아둔다. 일종의 색연필의 무덤이다. 그 무덤에 불량 색연필도 함께 넣는다. 불량 색연필이란, 심이 물러 연필깎이 안에서 뭉개지는 색연필을 말한다. 반대로 너무 건조해서 종이에 닿는 즉시 똑 하고 부러지는 색연필도 여기에 속한다. 색연필이 무덤에 들어갔다고 끝이 난건 아니다. 주문한 색연필이 늦어지거나, 일시적 품절이 되면 색연필 무덤을 다시 찾는다. 그리고 병 속에 손가락을 넣어 색연필을 고른다. 이리저리 손가락 움직이다 보면 한계에 다다른다. 결국, 병을 뒤집어 서랍 속에 색연필을 쏟아붓는다. 개중에 덜 무르고 덜 건조한 색연필을 속아낸다. 병에서 꺼낸 파란 색연필을 살살 달래가며 바지를 칠한다. 색연필이 바지에 떡칠했다. 나는 색연필을 병에 도로 집어넣고, 다시 고르기 ..